사람에게 자신의 이상적 소마 또는 바디를 투영하려 한다면, 그걸 교정이란 선처해준다해도 계몽 아래 수많은 이들을 교화하여 기껏해야 기계화된 인간상을 만든 노력과 별반 다를게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교정한다 한들, 자기 머릿속에 있는 수준에 그친다. 그리고 그 수준은 차라리 교정 안한만도 못한 상태일지 모른다.
이성에 대한 맹목과 그에 따른 교화는 그 교정하려는 행위 자체가 더 큰 문제를 유발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잊어서는 안된다. 사람 몸도 마찬가지다. 교정이라는 틀에 갖혀 있으면, 더 나은 교정을 지향한다 한들 교정이 갖는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교정하려는 노력이 육체적 불구는 고칠지언정 정신적 불구를 강요할지 모른다. 의도하지 않았어도.
무의식을 의식적인 차원으로 끌어오지 않는 이상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잔소리는 아들의 무의식적 반복을 막을 수 없다. 몸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고정된 자세를 바꾸게 하는 것으로는 신통치 않다. 100년 전보다 훨씬 복잡해진 세상 속에서 100년 전보다 훨씬 단순해진 움직임 또는 자세를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는 현대인들은 예전에는 없던 ‘습관에 의한 신체 문제’를 겪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