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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방향에서 황야의 이리의 정신을 살펴보면, 그는 고도의 개성화 때문에 시민이 될 수 없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개성화가 고도로 진행되면, 개성은 자아에 반역하고 자아를 파괴하려는 경향을 띠기 때문이다. 그는 성자 쪽으로도 탕아 쪽으로도 나아갈 수 있는 강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나, 어딘가 허약한 구석이 있어서 혹은 게으르기 때문에 자유롭고 거친 세계로 도약할 수 없고 시민 사회라는 무겁고, 버거우면서도 포근한 별에 사로 잡혀 있다. 이것이 세상 속에 있는 그의 상태이고, 그가 세상과 얽혀 있는 모습이다. 대부분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이런 유형에 속한다. 이 중에서 가장 강인한 자들만이 시민의 땅의 대기를 뚫고 우주에 닿는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체념하거나 타협하고, 시민 사회를 경멸하면서도 거기에 귀속되어서, 결국은 살아남기 위하여 그 사회를 긍정함으로써 시민 사회를 강화하고 찬미하고 만다. 이것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비극까지는 아닐지라도 상당한 불운이요 불행인 셈인데, 그 불행의 지옥 속에서 이들의 재능은 단련되고 풍성해지기도 한다.

인간의 사유에는 한계가 있으며, 가장 정신적이고 교양있는 인간이라 해도 언제나 단순화하고 대충 뭉뚱그리는 소박한 공식의 안경을 통해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니까. 특히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 가장 그렇다! 왜냐하면 누구나 자신의 자아를 하나의 통일체로 생각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아마도- 생래적인, 그리고 전적으로 필연적인 요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망상은 심각하게 동요되는 일이 있더라도, 언젠가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살인자와 마주앉아 그의 눈을 들여다보는 재판관은 한 순간 살인자가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듣고, 그 살인자의 감정의 동요, 능력, 가능성을 또한 자신의 내면에서도 발견할터이지만, 그는 바로 다음 순간 다시 통일체로 돌아온다. 그의 상상된 자아의 껍데기 속으로 서둘러 복귀하여, 자신의 의무에 따라 살인자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것이다. 특히 뛰어난 재능과 예민한 정신을 타고난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분열이 어렴풋이 예감되는 법이다.

이들은 모든 천재가 그렇듯이 인격의 통일성이라는 망상을 깨뜨려버리고 자신을 여러 조각으로 이루어진 존재라고, 즉 여러 자아의 묶음이라고 느끼게 된다. 이들이 이런 생각을 입 밖에 내기라도 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들의 입을 틀어막고, 과학의 힘을 빌려 정신분열증이라고 단언하면서 사람들이 이 불행한 자들의 입에서 나온 진실의 외침을 듣지 못하도록 막는다. 

– 황야의 이리, 헤르만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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